크리스천 가정

  •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란?
    결혼 –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결혼은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과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생각 해보고, 가족 구성원들의 의무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가 각자의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기 전에 주어진 유일한 제도입니다 (창세기2: 21-25) 하나님께서는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혼제도를 두셨으며, 그리고 그 결혼은 이 땅에서 가장 충만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결혼이 잘못 되었다면 그것은 결혼제도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누리지 못한 인간들의 부주의와 실수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결혼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와 비교할 만큼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에베소서 5:23-25:28). 이는 교회는 가정과 같아야 하며 가정은 교회와 같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혼 전 점검사항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다양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동기로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외형적인 매력 때문에,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인 안정을 위해서, 생리적 성적 필요의 충족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이나 불편한 가정에서의 도피를 목적으로 결혼하거나 낮은 자존감등과 같은 필요들을 채우고자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동기로 결혼을 하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잘못된 동기들이 드러나 결혼이 위기에 처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각자는 모든 문제들에 정직하고 투명함을 보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결혼 상대자의 사회적, 영적 및 육체적 전력은 물론 어떠한 문제든지 자유스럽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정직함을 보여주는 것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결혼의 위기를 막아줄 수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가끔은 약간 떨어져 서로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하기 위한 중요한 실제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떨어져 있는 시간은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상대방이나 아니면 또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결혼 상대자와 이런 시험기간까지 거친 관계인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이 다양한 필요들을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채울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즉 인생의 반려자, 가족, 사회적 그리고 성과 생리적 필요들이 결혼을 통해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하나가 될찌니’ (에베소서 5:3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안식과 행복 그리고 인류보존을 위하여 결혼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로서 결혼 제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은 결코 진화된 인간의 제도가 아닙니다. 결혼제도는 인간이 타락한 후 생긴 관습이 아닙니다. 결혼은 결코 인간들이 임시적으로 만든 관계나 단순한 관계나 제도가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분인 매우 신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평생을 서로간에 헌신하도록 계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마가복음10: 9). 결혼은 남녀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하나가 되도록 계획되었으며 자녀들을 생산하게 하는 특권이 부여된 기관입니다.

    결혼은 세상적인 관계가 아니며 매우 비밀스럽고 신성한 관계입니다. 이러한 결혼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대신되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스스로가 사람들이 아내를 위하여 부모와 갈라서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2:24). 이는 자신의 부모를 멀리하며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결혼의 가장 우선적인 관계의 책임이 부부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식장에 서있는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가장 고귀하며 우선적인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을 집례해야 합니다. 결혼은 매우 엄숙한 예식이며, 충만함이 부여되며 두 사람을 영원히 하나되게 하는 최초의 의식이기에 결코 경박하거나 무례하게 치러질 수 없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영혼과 삶을 일생 동안 하나되게 하는 제도입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영원토록 하나 되어야 하는 결혼의 의미도 인간이 범죄하기 전 벌써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찌로다’ (창세기 2:24). 한 몸이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어거스틴(Augustine) 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이렇게 잘 표현했습니다. ‘ 만약 하나님이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도록 하였다면, 아담의 머리뼈를 이용해서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종으로 만드셨다면 여자를 남자의 발가락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돕는 배필로 그리고 서로가 동등함을 의미한 것이다.

    헌신

    결혼이란 오직 죽음만이 갈라 놓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결혼식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약속을 교환하는 두 사람 간의 계약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혼식은 미래에 어떠한 상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미래의 상황이란 ‘좋은 일이 있을 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병 들었을 때와 건강할 때,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를 말합니다. 결혼식에 선 두 사람은 죽을 때만 서로 무효가 될 수 있는 계약서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이 삶과 마음까지 하나 되겠다고 약속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하늘의 천사들도 그 경이로움에 노래를 멈추고 잠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결혼식은 거룩하고, 성스러우며, 운명적인 예식이기에 성도들은 이러한 성스러움을 이해하는 성도들의 앞에서 행해져야 하는 의식입니다. 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결혼식을 가볍게 대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계획된 것이라면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새롭게 시작하는 두 사람의 새로운 관계를 무엇이 지탱해야 하겠습니까? 갈등과 조정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러한 내용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연성과 이해

    모든 교회의 목사님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될 때 그곳엔 반드시 갈등과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가족, 성장 배경 및 인격들을 가지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는 면이 하나가 되기까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조정 기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 기간에 서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에게 사소한 것이 여자에겐 중요하고, 여자에겐 사소한 것이 남자에겐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각자의 습관, 성향 또는 기질에 있어서 구애 기간 동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른 면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두 사람이 비슷하다면 결혼생활은 곧 싫증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함’만큼이나 서로의 다름에 찬사를 보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 조정 기간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방법은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라는 이 세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 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는 말씀을 참고해야 합니다. 가끔 이 조정 기간에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결혼이 정말로 잘못된 결혼이었다는 생각들에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럴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결혼은 헌신과 서로가 맞추어 간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 전 서로가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리고 결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 진 것이며, 서서히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모든 면에 서로가 만족할 만큼 성숙해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지요.’두 사람이 함께 살아 보기까지는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모르고, 결혼해서 살아보기 전까지는 참된 결혼의 즐거움을 알 수 없습니다.’

    어찌하면 두 사람의 조정이 잘 이루어 질 수 있을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혹시 두 물줄기가 하나로 되는 것을 지켜 보신적이 있습니까? 한줄기는 흙탕물이며 한 줄기는 깨끗한 물 줄기 일 수 있습니다. 이 두 물줄기가 뚜렷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보면 확실히 흙탕물과 깨끗한 물이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합쳐진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흙탕물과 깨끗한 물이 구분되어 지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이 완전히 섞여 버리는 것입니다. 결혼도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됨과 온전함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다가 올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면 서로의 다름은 줄어들고 결혼 생활은 더욱 좋아지고, 고결 해지고, 강해 질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와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내어 각자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큰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은 부부가 깊은 좌절과 이기적 자아 속에 있을 때 마귀는 결혼생활을 끝장 내려고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 부부가 절대로 고려해 보거나 의논하지 않기로 서로 동의해야 할 한 단어는 ‘이혼’ 입니다. 이혼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혼을 함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리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하나되게 하셨다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그리고 당신의 인내심이 합해져서 용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거만함은 결혼생활에서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거만함이란 결혼 전에 허용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도 허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단

    결혼 관계를 세워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행복에 관하여 하는 심사 숙고는 적고 결혼 생활을 간결하고 쉽게 해보려는 생각은 많은듯합니다.

    과학자가 그의 연구를 위하여 실험실 안에서 오랜 기간 스스로 차단 될 때, 또는 어린 아기가 불구로 태어 날 때 또는 엄마들의 마음이 작은 고통의 의자에 묶여 있을 때 그들의 심령이 어떤지 혹은 기쁜지 아니면 불행한지 하는 바보 같은 질문으로 그들을 어렵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질문들은 그들에게 아주 무례한 질문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결혼은 우리 겪어야 내야 하는 약속입니다.그 약속에 뛰어 들기 전에 먼저 살펴 보아야 하고 또 뛰어 든 후에는 그 임무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결혼이 성공적 일 것이건 아니면 실패할 것인지에 관한 것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헌신과 용기와 희생으로 승리하지 못하면 행복을 얻을 권리가 없습니다. .

    헌신, 용기 그리고 희생의 세 가지의 값진 요소들로 인하여 가져 오게 되는 행복과 기쁨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결혼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가질 수 있기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장 21절입니다.

    행복은 동기 부여의 목적이 아닙니다. 행복은 바람처럼 변합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서 2장 13절-14절. 크리스챤 부부들에 주는 결혼의 의미는 두 사람 안에서 새로운 삶이 존재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행복이 결혼을 통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고 가장 높게 여겨지고 또 결혼의 목적으로 된다면 행복은 교묘하게 잡히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남자나 여자들은 헌신적으로 인내와 용서로 어떤 값을 치러서라도 결혼의 여정을 지키며 또 그리하여 행복을 찾습니다.

    결혼은 은혜이며 얄팍한 사람들의 행복이 아닙니다. 결혼은 마치 삼각형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닥의 두 코너는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입니다.  꼭 대기 코너는 하나님이 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배우자와 가깝게 될 것이고 서로가 가까워 진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장 10절 후반 말씀입니다.

    공손과 예의

    만일 당신이 결혼한 사람이라면 당신의 배우자가 얼마나 주의 깊은 사람이었는지 기억 할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서로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무엇을 해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생활 속에서 필요한 작은 공손한 말 투까지도 쉽게 놓아버립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당신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에요.”, 또 다른 격려의 말들이 자주 사용되지 않습니다.  사려 깊은 작은 공손한 언동들이 소홀해져 가기 시작하는 서로의 마음과 행복에 큰 영향을 줍니다. 물론 그것이 한 쪽에만 관련이 있지 않습니다. 아내의 소홀 함도 남편만큼 문제가 됩니다.

    요점은 이러한 말들이 결혼의 성공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순화가 서로를 지켜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을 때 그 마음은 꼴사나운 태도로 영원히 가로 막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들이 소홀해진 관계를 더욱 더 민감하게 만듭니다.  본래의 마음과 사랑은 충실하며 내구력이 강한 나무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침 이슬이나 따뜻한 햇빛 또 부드럽고 공손한 행동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강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결혼한 부부들이 근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마음의 친절함, 애정 그리고 사려 있는 공손함에 굶주려 하는지 모릅니다. 많은 부부들이 바로 이런 시점에서 파멸을 맞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심의 조화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너무 쉽게 갈라 설 수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알았을 때는 해주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 남편은 그의 일터에서 전문적인 그의 임무와 매일처럼 치러야 하는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아내들은 집안의 문제들과 자녀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종종, 서로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멀어져 있으며 또한 너무나 멀어져 버린 서로의 관심들로 인하여 쉽게 생겨지는 오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위한 아주 좋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아주 멋있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멀어져 가게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같이 책을 읽었습니다. 서로의 문제들과 원하는 것들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같이 예배하고 같이 기도합니다. 많은 세월들을 통하여 그들은 완전한 결혼의 사랑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어떤 남자도 그의 아내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만일 아내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지 않은 징조이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을 가지는 것에 실패하는 어리석은 일 입니다.  결혼은 좋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부부와의 관계도 바르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해를 막기 위한 시각

    결혼 생활은 누가 먼저 책임을 다하고 먼저 화해하고 먼저 사과하고 하는 것을 계산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실 된 사랑 안에서는 그런 결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그런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아주 공격적인 언어들을 사용했다면 그날 바로 사과를 해야 합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화가 나는 말들을 사용한 그날에 하시는 아주 좋은 말씀이 에베소서 4장 26절에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당신과 배우자와의 관계를 완전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미안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배우자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며 좋은 잠자리가 되게 할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먼저 용서하면서 오는 기쁨입니다. 결혼 생활 안에서의 자만심은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혼 전에도 허락 되지 않으며 결혼 후에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정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그리고 당신의 일상의 대화에서 성경을 벗어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정을 가진 적이 없었지만 그는 가정을 사랑하셨고 각각 다른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 셨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가정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가정을 사랑하시고 어느 때에라도 환영 받는 손님 이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초청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는 그런 가정 상황이나 인간관계를 절대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외되고서는 깊고 변하지 않을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한 동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평화롭게 함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지속적인 임재가 없이는 진정한 가정으로서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가정의 심장은 아내입니다. 모든 가정의 머리는 남편입니다. 모든 남편들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린도전서 11:3).

  • 남편 - 가정의 머리

    남편 – 가정의 머리

    먼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성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고 여자는 여성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의 신체적 구조는 몸의 세포 조직으로부터 23개의 염색체까지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정신적 그리고 관계성으로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며 그래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둘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동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분명하게 명령하시며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분명히 주셨습니다. 남자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에배소서 5:25),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에배소서 5:28).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부여 하신 더 높은 목표는 무엇입니까?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며 보호하고 이런 여러 측면에서 같은 관심을 보이며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똑같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런 대접을 할 때에 아내도 남편인 자신을 주께 하듯 존경하고 순종하는 일이 쉽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신의 동반자라는 것을 반드시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이러한 관계는 남편의 기도를 효과 있게 하고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7)하신 말씀처럼 남편의 영적인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영적, 도덕적인 삶뿐만 아니라 존경과 명예와 사랑을 요구하는 육신적인 삶의 요소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더욱이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번식은 언제나 하나님의 창조계획의 증거였습니다. 다음 성경 귀절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현대 사회의 생각이라고 사려되어지는 그 남용에 대해 한번이지만 영원히 정해진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 현대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동성애는 우리 창조주의 계획을 악하게 남용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번식할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것을 어지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계획을 어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한 본보기로 그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에 대해 의문사항이 있으시다면 로마서 1장 26-27절을 읽어 보십시오.

    남편(husband)이란 단어의 의미는 집을 묶다 (house – band)입니다. 남편은 가정을 하나로 묶는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그 끈이 끊어지면 집은 무너지고 말것입니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남편의 결론적 의미는 지도자가 되다. 보호자 그리고 부드러운 사랑의 돌봄으로 공급하는 자입니다.

    희생이 요구 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보십시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에배소서 5:25). 이것은 선택사항은 아니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의 높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는 내 차를 사랑해’, ‘나는 우리 개를 사랑해’, 또는 ‘나는 승마를 사랑해’ 이런 말을 자주 하는데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결혼생활에서의 사랑에 대해 말을 할 때에는 그것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배소서 5:25).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이 말씀대로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것에 이르도록 요구되어졌기 때문에 모든 진실한 남편들은 이것을 목표로 삼아야만 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 진정으로 이것을 통과하기로 한다면 그의 안에 있는 모든 이기심은 결혼이란 제단 위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연관해서 사랑은 무엇을 포함합니까? 결혼생활에서 아내는 많은 일들을 남편을 위해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귀절은 이러한 사랑이 바른 견해이며 또 이러한 사랑에 더 명확한 이해를 갖게 해줍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께서 이러한 모본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최고 친구인 우리의 아내를 위하여 이보다 덜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어떻게 결혼 생활에 연관되는지 보도록 합시다.

    아내도 역시 수 백 가지도 넘는 일에 끌려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안에서 이런 일들이 나쁜것들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에서 우선순위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똑같이 행 하여야만 합니다. 남편이 이런 지침을 세우는데 책임이 있으며 가정에서 지도자로서의 본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일이 아내에게 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내는 따르며, 성경적인 참된 원리에 의하여 함께 지도를 받는 남편의 본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식탁에서 식사기도를, 밤에는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경건의 시간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남편은 말씀을 배우는 학생 이어야 하고 가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상황들을 성경적인 가르침과 진리로 적용하여야 합니다. 남편은 가족을 교회로 데려가야지 보내서는 안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결혼을 세워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함께 일해 나가야 합니다.

    육적, 영적인 지도력

    사랑은 무한하나 지도력에는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지도력은 우수하나 사랑에는 형편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성의 자부심은 자주 스스로 실제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 되는게 발견됩니다. 이것에 대한 열쇠는 균형입니다. 남편과 아내 양편은 자신들이 맡은 역할에서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나친 의무는 결혼관계에 스트레스를 주고 가정에 긴장을 가져 옵니다. 가정이 우선순위이지만 우리의 시간을 투자 하는데에 균형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남편들은 사업적인 모임들과, 일주일에 여러 번 있는 저녁시간의 교회 활동들, 또는 스포츠에 빠지는 것 등등 여러 가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소비하게 하고 가정으로부터 당신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수 천 가지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성경은 당신의 가정 생활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열쇠는 ‘순종‘ 인 것입니다.

    1. 성령님께 (에베소서 5:18-19)

    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간에 (에베소서 5:21)

    3. 아내가 남편에게 (에베소서 5:22)

    4. 남편이 그리스도에게 (에베소서 5:25)

    5. 자녀가 부모에게 (에베소서 6:21)

    6. 종들이 상전에게 (에베소서 6:5)

    7. 주인들이 하늘의 상전에게 (에베소서 6:9)

    물질의 공급

    사랑이란 단어는 많은 책임들을 포함하며 내포 되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결혼 서약에서, 남편은 부양의 짐을 떠 맡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남자라면 이러한 의무를 피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의 책임을 가볍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날카롭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 전서 5:8). 일반적으로, 아내가 생계의 한 부분을 담당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야 할 때, 특별히 집안에 어린 자녀들이 있을 때 이것은 최선의 일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린이의 생애 중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시기는 태어난 후 처음 6년 동안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자녀의 생애를 형성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이를 봐주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환경적으로 필요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족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남편의 책무이며,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의 최선을 다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남편의 책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많은 남편들이 여기에서 실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녀와 아내를 위하여 지나치게 준비하기 위한 열심에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부관계에 주님이 함께 하도록 하는 데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역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더 풍성하게 축복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18). 진실하고 지혜 있는 남자는 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 아내와 자녀에게 부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드림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한 부분임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편이 가정의 물질적인 필요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에 대한 궁극적인 공급자이십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이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4:19).

    하나 됨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쳥혼을 할 때에 그는 이러한 행동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 가운데서 그 여자를 선택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결혼을 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하나가 영향을 받으면 다른 하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특별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돌봄과 이해심이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되어 함께 살 때에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명령을 주십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7). 당신의 아내를 옳지 않게 대접하면 당신의 기도는 막히게 되고 당신의 전 생애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아내의 육체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지며, 목소리가 더 이상 음악적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잔병만이 남게 되었을 때에도, 남편은 여전히 진실되고 깊은 마음으로 아내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처럼 (에베소서 5:25) 당신도 자신을 아내에게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남편에게 주시는 높은 표준이지만 천국 집에서 여러분을 부를 때까지 실행해야 하는 표준입니다.

    위험 지구….. 여자를 대하는 것과 여자에 대한 생각의 과정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남자들에게 있어 가장 강한 유혹거리이고 사탄은 당신의 결혼을 파괴하기 위하여 이것을 사용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남편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반드시 지켜나가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일절 순전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2). 남자는 결혼 이외의 어떤 종류의 상상이나 성적인 일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3-4, 히브리서 13:4).

    욥은 자기의 눈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욥기 31:1). 그는 악한 생각으로 다른 여자를 보지 않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눈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텔레비전에서 그런 장면을 본다면 채널을 돌리십시오. 잡지에서 본다면 페이지를 넘기십시오. 만일 당신의 컴퓨터에 나타난다면 빨리 지워버리십시오. 다시 한번, 당신의 눈과 생각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마음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대답을 주십니다 -피하라 –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디모데후서 2:22 ).

    사려 깊음

    대체로, 남자들은 사려깊다는 점에서는 가끔씩 주의력이 부족합니다. 문제는 가정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주의력이 떨어지고 평소 쉬운 습관으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가게에서나 길거리에서 당신은 대단히 주의 깊습니다. 공손하고 마음을 세심하게 씀니다. 당신의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숙녀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당신은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당신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하루 종일 억누르고 있던 말과 모든 문제들을 배출해냅니다. 당신은 말을 끊고, 대충 짧게 말하거나 무뚝뚝할 수 있습니다. 질문에 짜증 섞인 목소리 로 조급하고 무례하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아내이기 때문에 비록 당신이 무례하게 군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행하는 것이나 말하는 어느것이라도 비록 그것이 다른 여자들을 정말 화나게 하는 것일지라도 아내는 그것을 괘념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함에도 당신은 아내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루종일 힘들게 보낸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가정에서 빚어지는 또 다른 큰 실수는 친절함과 인내심을 위해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자들이 말을 자르거나 심술굿게 하는 사람은 없다 할지라도 부드럽게 말하거나 사랑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짧고 메마르며 사무적입니다. 연애할 때의 따뜻함과 신혼초의 남편은 이상하게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랑하며 돌보며’ 했던 그 약속은 이윽고 잊혀져 버린것입니다.

    얼마나 선견지명이 없는 정책인지요! 사랑은 어떠한 종류의 사랑일지라도 가꾸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죽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특별히 세심하고 사려 깊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하루 종일 아프거나, 말을 듣지 않으므로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집안일이 온통 뒤죽박죽 이거나 일이 밀려 있을 때, 특별한 일로 하루 온종일 뭔가를 돌봐야 할 때입니다. 아내는 상처를 입고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만일 남편이 부드러움을 보인다면 그날 하루 동안의 기억은 빨리 씻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작은 사려 깊음이 하루의 전쟁을 지워버리고 마음에 기쁨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조언

    만약 남편이 그 아내를 자기의 아내될 자격이 있다고 느끼고, 성숙하고 지적인 사람으로 우러러 본다면 이것은 인정 받을만한 일입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결혼 후에 자기 아내를 아이들과 같은 정신 수준의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업이나 그날 하루 동안의 전쟁에 대해서도 결코 나누지 않습니다. 이제 여자들은 사업에 관하여는 전혀 몰라도 훌륭한 조언을 해줄 수 있습니다. 때때로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아내는 잠언 31장에 나오는 여인으로 그 아내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남편에게 현명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남편만큼은 그 아내의 머리가 모든 세부적 사항을 생각지 못할 수 있지만 남자의 조직성이 천천히 결론에 이르는 동안 여자는 직관적 통찰력으로써 올바른 점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여자들이 몰두하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에서 많이 또는 조금이라도 떠나게 되면 판단력이 더욱 명확하고 더욱 정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업에 관한 일에서 아내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많은 남자들이 더 많은 몫의 축복으로 인하여 자기 아내의 판단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큰 마음

    머리와 가슴은 반드시 하나이어야 합니다.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집에서는 째째한 폭군 노릇하는 남편에 의하여 천국이 우리 곁에서 떠나 버립니다. 그는 중심이 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며, 폭군처럼 가족들을 못살게 굴며, 고함치듯 명령하고,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마치 동물과도 같이 취급합니다. 모든 비열한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은 최악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들에게 대한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하신 의미의 개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내어 드림

    이러한 생각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아내를 향하여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의 편안한 삶을 위하여 모든 필요를 준비합니다. 사려 깊고 마음이 넓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족과 의논하며 친절하지만 영적인 일들이 다가오면 그들은 뒤로 물러서며,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아내의 삶 가운데 가장 깊숙하고 가장 신성한 부분에서 자기자신들을 닫아 버립니다. 아내 혼자 교회에 갑니다. 주의 만찬에 아내 혼자 앉습니다. 아내 혼자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아내 혼자 희망과 시험 그리고 영혼의 열망을 품습니다. 아내 혼자 이 세상 사람 그 누구보다도 더 자기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기를 원합니다. 그는 이 모든 것에서 자기 아내와 나눌 것이 없습니다.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마가복음 3:25)

    그는 결혼식에서 서약한 바로 그 맹세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몸과 혼과 영의 세 부분으로 만드셨습니다 거룩한 영적인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이 결합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소경이 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 있는 부인들에게 이러한 결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바라볼 수 있으며 또한 아내의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간증이 남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 3:1).

    만약 혼과 영혼이 함께 하나이지 않는다면 이 결혼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혼이 아닙니다. 남편의 이러한 행동은 아주 옳지 않으며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자리로 그를 이끌어 그에 대한 대답을 주실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아내와 가족들에게 정말 크게 잘못하는것이며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심판대에서 드러나지게 될것입니다.

    마음들은 영원한 교제 안에서 하나로 되어져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의 시간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 저 너머를 통과하고, 영원을 다 지나기까지 남아 있도록 하나 됨을 준비하는 시간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축복하기 원하셨지만 할 수 없었던 실패한 결혼 위에 천국에서 많은 눈물이 흘려지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만 우리는 있었던 일들은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주지만 이런 일들을 생각하도록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아니하는 남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도우시도록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삶의 주님으로 모시도록 우리는 기도 합니다.

    만약 일들이 올바로 되어있지 않아 당신이 그것들을 바로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친구가 당신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린다면 당신은 문을 열고 그를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청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분을 들어오시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분이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곳을 매일 당신의 삶 가운데 예수님과 당신이 교제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드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당신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 아내 - 가정의 중심

    아내 – 가정의 중심

    만약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는 여자 분이고 결혼생활에서 당신의 역할을 이해하기를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읽기를 중단하고 성경 잠언 31장을 펴 보십시오 (10절에서 31절까지 읽고 묵상을 하여 보세요). 이것이 결혼생활에서 당신의 역할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성경 구절 입니다. 다음에 오는 구절들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창시하신 아름다운 관계를 이해하고 이 성경 말씀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세워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나는 모든 여성들이 미래의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값어치를 이해 하리라고 믿습니다. 잠언 31:10절에서 남편을 대한 당신의 값어치는 진주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한 남자가 당신에게 자기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했을 때 당신은 이 지구상의 모든 여자들 중에서 선택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천사가 흠모할 수 있는 책임감과 기회를 수반합니다.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이 지상에서 필요한 존재로서 자기의 남편과 자녀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또는 그 어느 것보다도 당신의 남편과 자녀의 미래에 가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발전과 운명이 당신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녀는 가정의 소산물이다’ 라고 자주 말하여 집니다. 부모님이 똑같이 가정에서 자녀에게 영향을 주지만, 어머니가 투자하는 시간과 가르침이 자녀의 습관과 성격 그리고 사고방식을 형성하며, 어머니의 영향력이 더욱 강하게 역사합니다 (잠언 31:28).

    아내 (wife)라는 말의 의미는 ‘짜다’(weave) 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디자인을 넣어 아름답게 가정을 짜는 것이 아내인 것입니다. 모든 실들은 서로 칭찬을 하여야 하며, 서로 의지하고, 짜는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아내에 의하여 짜이는 가정은 매일의 활동 속에서 성령님의 동행하심을 드러내는 은혜와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그녀의 자녀와 남편의 삶 가운데서 명백하게 투영 될 것입니다.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잠언 31:28-29).

    가정은 여자의 영역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며 성령께서는 인도하시고, 영향을 미치시며, 지도하시며, 가르치시고, 말씀 안에서 살도록 강권하시는 것처럼, 아내는 가정 안에서 성령과도 같습니다. 그녀의 영향력이 온 가정 안에 미치는 것은 마치 교회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내는 남편과 자녀가 믿음 안에서 성장 하도록 지도하고 가르치며 위로하고 격려하며 주고 이해합니다.

    어느 작가가 오래 전에 쓴 글에 의하면 좋은 아내란, “ 좋은 아내는 하늘이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그의 천사이며, 셀 수 없이 많은 은혜의 대사이고 그의 많은 미덕의 보석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가장 감미로운 음악이며, 그녀의 미소는 가장 광명한 날이다. 그녀의 입맞춤은 그의 순결함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그녀의 두 팔은 그를 안전하게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녀의 근면함은 그의 가장 확실한 부유함이며, 그녀의 절약성은 가장 안전한 청지기다. 그녀의 입술은 가장 안전한 의논 상대이고 그녀의 가슴은 그를 돌보는 가장 포근한 베개이며, 그녀의 기도는 하늘의 축복을 그의 머리에 내리게 하는 가장 능력 있는 변호사이다” 라고 하였다.

    위의 것이 이상적인 아내상이라면, 남자와 결혼에 들어가기 이전에 몇 가지 질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내는 가정의 심장이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경건한 아내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여야 합니다. 선하고 진실한 아내가 되기 위하여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당신이 갈망하는 삶입니까? 여기에 크리스천의 결혼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아내의 상을 성취 하기 위한 요구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동반 관계

    저는 더 큰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합니다. 잠언의 현숙한 여인을 한번 더 읽어 보십시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그는 그녀가 자신의 가장 훌륭한 친구이며 동료이고 자기만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임을 압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관심거리와 하려고 하는 모든 일에 그녀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또한 그녀에게 이와 똑같이 행해야 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필요들과 미래의 계획들에 대하여 생각이 깊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편에 설 수 있으며 그의 꿈들을 향상 시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결혼한 그 아름다운 아내만큼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거나, 시각과 목표와 미래를 확장시켜주고 또 헌신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안일을 잘 하기

    어떤 직업들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상업의 중심지에서 남자와 여자가 직업을 얻기 위해 경쟁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직업을 구함에 있어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권세, 돈, 자아, 받아들임, 인정받기 위함, 권리, 타성에 의한 것이나 또는 다른 많은 이유들일 수 있지만 이것들이 다 맞는 것도 다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 동안 나가 일을 한다면 수입이 늘어나 자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더 나은 집이나 새 차, 사교육 그리고 그 항목이 끝이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확신 시킵니다. 그러나 조사는 보여주기를, 그들이 일을 하게 될지라도 그들이 꿈꾸었던 기준의 삶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입이 늘어나면서 그 꿈들도 더 향상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한 부부가 두 사람의 수입을 기본으로 한 그들의 삶의 기준을 한번 정하고 나면 좀처럼 한 사람의 수입으로는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발판에서, 두 사람은 명백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대한 시각을 잃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것이 정말 여자를 위한, 특별히 집에 어린 자녀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입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디도서 2:4-5).

    만약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처럼 가정이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면, 가정사는 그 질서대로 성경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그때그때 바로 처리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내가 집안일을 하므로 가정과 자녀를 간수하고 사랑하여 가정을 안식처로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그녀가 집을 지킬 수 없고 집안일을 배울 수 없다면 또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을 반드시 두어야 합니다. 산뜻하고 잘 가꾸어진 집은 행복한 결혼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수 불가결합니다.

    젊은 부부에게 이런 말은 썰렁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을 덜하게 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눈코 뜰 새 없는 스케줄 때문에, 특히 집안이 늘 정리되지 못한 채 엉망이고, 식사는 준비되어 있지 않으며, 아이들은 돌봄을 받지 못하고 다투며, 물건이 뒷정리가 안 되는 일들로 인하여 많은 행복한 결혼들이 파괴됩니다. 남편은 성공을 위하여는 반 강압적 조직인 일터에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각 개인은 그들의 업무에서 질서정연함과 효율성이 요구됩니다. 만약 이것이 상업의 중심지에서 성공을 위하여 중요하다면 성공적인 가정이 되기 위하여는 얼마나 더 이것이 필요하겠습니까?

    남편이 매우 인내심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종일관 더럽고 무질서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분위기가 냉각되고 가정의 기쁨은 소멸될 것입니다. 물건들이 흩어져 어수선하고 단정하지 못할 때, 물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있지 않고 여전히 지난번 놓여있던 곳에 그대로 버려져 있을 때, 가정에는 긴장감이 조성되고 낭만은 곧 창문 밖으로 날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만약, 아내로서 가슴 설레는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가정을 쉴 수 있는 안식처로 만들어 그가 일터의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당신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이 어떠해야겠는지. 사랑과 존경은 관계를 결합하여 주는 줄입니다. 그것이 관계를 세우거나 혹은 파괴하는 것일지라도 집안을 적절하게 간수 하는 것은 분위기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들처럼 이것도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초의 가장 중요한 돌 하나는 집안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공동의 대화

    대화는 서로 상대방에서부터 흘러나와 모든 것을 그리고 어느 것이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신뢰하는 가운데 나누어진 것들은 반드시 신뢰로 지켜져야만 합니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관계에 있어 기본적인 신뢰에 큰 손상이 가게 됩니다. 아내가 아무것도 남편에게 숨기는 것이나 비밀이 없이 남편을 온전히 신뢰할 때 그녀는 밖에서 자신의 집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남자들은 때로 자기 아내에게 못되게 대합니다. 그는 때로 아내에게 고통이 되고 괴롭게 하는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해야 할 이런 저런 의무에서 실패합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이런 것을 결코 집밖이나 집안 자기 자녀 앞에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오직 자기 남편이나 주님께만 그것들에 관해 애기 할 것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남편의 허물들을 바르게 하여 주기 위해 노력 할 것이나, 그녀는 인내하며 사랑으로 대하며 그 문제를 자기 마음에만 간직 할 것입니다. 잠언 31장은 경건한 여인을 위한 특별한 장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담을 만한 성경구절입니다.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잠언 31장 26절).

    여기서, 때때로 치명적인 실수가 만들어 집니다. 아내들이 어리석고도 스스럼없이 존경 해야 할 자기 남편의 실수들을 서로 잡담합니다. 더욱이 사랑은 흠과 오점을 관찰하며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종종 다른 남자들에 관하여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녀가 자기 남편의 허물들을 애기하고 있는 그 불쌍한 남자는 과연 그런 모양으로 말을 하며 자기 자신의 머리에 대해 불경스러움이나 가져오는 자기 아내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의심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가족이나 가정에 대해 말할 때에 당신의 말과 마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 자녀 - 가정의 열매

    자녀-가정의 열매

    Charles Lamb가 말하기를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를 수 없다는 것어머니의 선한 영혼을 가슴 아프게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 모든 성숙한 자녀들은 확실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하셨던 일들을 되새겨 볼 것입니다.

    어떤 자녀들이라도 가정의 한 일원으로써 너무 작다고 하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제 시계의 시침은 매우 작습니다. – 어떤 것은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 하지만 그것은 시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때로 심하게 앓거나 화를 내어 온 가족들을 당황시킬 때도 있고, 아주 사랑스럽고 밝은 모습으로 집안에 평화와 행복을 가득 안겨주기도 합니다.

    순종

    부모로써 꼭 해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 사랑, 훈련, 교육 입니다. 그렇다면 집안에서 자녀들의 의무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자녀들아 부모님이 옳을 때 순종하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옮으니라.”(에베소서 6장 1절)라고 말 합니다. 부모님이 옳지 않은 경우까지도 말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말합니다.

    몇까지의 사건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나,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그들에게 순종하여” (즉, 그의 모친과 양아버지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순종하던 이 자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셨습니다.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셨습니다.“그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것과 그가 없이는 어떠한 것도 만들어 지지 않았다” 그는 천국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권능자 이십니다. 순종에 대한 멋진 교훈이지 않습니까?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장 4절)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굴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자진해서 하는 구속이며, 그들을 제한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지요.

    예수님께도 그것이 적용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젊은 이들은 크리스천 부모들의 충고를 주의 깊게 따르는 것에 의해 타락되거나 구속될 일은 없습니다. 어떤 자녀들도 순종함으로 방해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거나, 부모님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고 하여 다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되기까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체포되어 집을 떠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순종은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움과 불쾌함 까지도 포함합니다. 꼭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주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은 “주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이 그릇된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녀들은 그것까지도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로새서 3장 20절)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부모들이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권리로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명령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비기독교이인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리도록 요구한다면, 그 결과는 자녀들이 아닌 부모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맺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바다에 던 지움이 나으리라. (마가복음 9장 42절)”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라

    위의 것을 종합해 보면, 부모들은 자녀를 훈계하기 전에 “자녀들아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신 말씀이 “부모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라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관계는 확실하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부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간에 분쟁을 야기시킵니다.

    저는 젊은이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말이 필요 없음을 압니다. 자기 어머니를 아주 부끄럽게 생각하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어머니가 점차 늙고 초라해져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옷은 늘 기대보다 허름했고, 손은 붉은 빛이 도는 고생으로 쭈글쭈글 하였습니다. 어린 소녀는 어머니가 부끄러웠고 자기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을 인사시키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또한 그 부끄러움은 아버지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깨가 구부정하시고, 햇볕에 까맣게 그을리신 얼굴에 손은 장애가 있으셨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오랫동안 고생과 노동을 해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은 자신보다 훨씬 나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년과 소녀는 세련된 옷을 입은 친구들에게 “늙은 아비”를 보여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끌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비슷한 일들을 보아왔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노고, 노환, 질병, 부족함이 여러분들을 위한 사랑의 징표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피를 흘리시며 삶을 살았고, 이러한 징표들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눈을 하나 가진 사람 혹 여러분 삶을 지키기 위하여 잃어버리신 분을 부끄러워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 더한 것도 해 오셨습니다. 그들께서는 밤을 지새우시고 걱정의 날들을 보내오셨습니다.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질병을 앓아 오셨습니다. 자기의 안위와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으셨고, 여러분들의 사치와 풍요를 위해 자기 삶의 필요한 것까지도 부인하고 살아오셨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수고하셔서 여러분들을 교육시키고 세상에 나가 훌륭한 일을 하게 하려고 준비시키셨습니다. 그것이 그러한 거룩하고 희생의 흉터와 자국이 나온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들을 부끄러워 할 수 있습니까?

    미드 웨스트 마을의 한 사업가가 아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분께서는 교육을 위해 자신의 사업을 저당 잡히셨습니다. 그는 매사에 아끼고 절약하였으며, 아내 또한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없이 지냈습니다. 그의 아들만큼은 깔끔한 옷을 입히고, 넉넉한 돈을 받는 학생들 사이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이 늙은 커플은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마차에 말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들이 아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차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마일이 떨어진 대학가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업이 막 끝났을 때 즈음 도착하였습니다. 때마침 친구들과 캠퍼스를 지나가는 아들 해리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아들에게 다가가려 할 때, 아들의 친구들이 낡은 마차와 말 그리고 초라한 옷을 입은 늙은 부부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해리는 잠시 멈추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멍하니 보더니 얼굴을 붉히고, 재빨리 그 자리를 슬쩍 피하여 사라졌습니다. 마치 그들을 모르는 사람인 척 하였습니다. 마음이 상한 늙은 부부는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밤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해리처럼 행동하는 소녀, 소년들이 있다면 꼭 부탁 드립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 두 분 이나 한 분에게라도-가 살아계신다면, 그들에게 다가가 어루만지며 그분들이 여러분을 위해 해 주신 일들에 대해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만약 부모님들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즉시 편지를 쓰세요! 사랑이 가득 담긴 장문의 편지에 격려와 감사를 전해보세요.

    자녀는 나이가 들어도 부모에게 자녀가 안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과 존경은 부모님이 살아있는 한 계속 갚아져야 합니다.

    삶은 헌신된 생각과 부모의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를 사랑으로 기르는 것보다 몇 가지 더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한 마음 같은 것이죠.

    우리의 부모가 나이가 들게 되면 입장이 바뀌게 됩니다. 그들께서 우리를 양육하셨지만, 커서는 우리가 부모님을 보살펴줄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께서는 이제껏 우리를 보호해 주셨고 어려운 폭풍속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보다 더 강하고, 그들은 나약해 지셨습니다. 이때가 빚을 갚을 수 있는 멋진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미약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자녀도 부모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모두 갚을 수는 없습니다.

    삶은 자녀들이 부모님께 의존하고 그들이 필요할 때 진실과, 친절로 대하는 것보다도 더 강한 몇 가지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평안케 하고, 천국을 만들며 기대감 속에 더욱 영화로운 재 단결을 하게 합니다. 기회를 잃지 말고 후회 없이 부모님께 “편히 쉬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 가정에서의 자녀들- 하나된 가족

    가정에서의 자녀들- 하나된 가족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편127편 3절)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맡긴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 일보다 더 짜릿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여러분께 맡겨드리신 사명은 아주 거대한 책임감입니다. 이 생명은 당신이 가르치고 당신의 형상으로 본받은 사람입니다. 어떠한 것도 그들의 웃음소리, 노랫소리를 듣는 것과 때로는 그들이 삶의 교훈과 기쁨을 배움으로 흘리는 눈물을 보는 것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습니다. 연구결과 어린이의 삶은 85%가 가정으로부터 반영된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어린이는 바로 당신의 집이 어떠한 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여러분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접할 것입니다. 그들의 육체적, 영적인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 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신의 삶에서 자녀들은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의 첫 줄을 장식해야만 합니다.

    자녀들이 본인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따를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의 길로 빠져야만 합니까,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기억하세요. 분명히 그 아비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고 그의 아들을 애타게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집 근처를 항상 배회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이 용서를 빌기도 전에 아버지의 마음에 용서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20년 이상을 의미하는 자신의 농장을 망친 한 남자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남은 것이 거의 없고, 황무하였으나 4월이 되어 햇볕과 비가 알맞게 내려 셀 수 없이 무수한 꽃들을 피웠습니다. 씨앗은 분명히 항상 뿌려졌는데, 문제는 비와 햇빛이 성장과 개화를 막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가정이 아직 성장치 못한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애정과 조화

    우리는 언제나 자녀들이 궁금해하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있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녀들과 어떤 것을 나누면서 용기를 북돋워주고, 그들에게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한 의견이 다른 것을 인정하는 권리를 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러한 방침이 있습니다.“모든 것은 논쟁거리가 될 수 있으나 항상 협상가능 한 것은 아니다.” 내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시간들은 성경 토론의 훌륭한 시간으로 이끌어 집니다. 우리는 이것이 자녀들을 생각하게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것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확인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항상 그들이 말하기 원할 때, 우리는 말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원칙으로 합니다. 종종 취침시간에 자녀들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마도 정말 대답을 원해서라기보다는 잠을 청하기 싫은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화를 흥미있어 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흥미있게 들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실패한 가정은 부모님이 자녀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집입니다. 종종 형제들끼리 또는 자매들끼리 집밖에서 자신들의 친한 친구들에게 조언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집에서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묻기도 하고, 또는 집에서 묻는 것조차 꺼리기도 합니다. 그 ‘친구’들은 형제, 자매가 아닐 수도 있으며 또는 이웃 소년, 소녀들이 잘못된 대답을 주기도 합니다.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종종 가정생활이 너무 친밀하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하다보면 재미와 신선함을 잃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가장 친한 친구가 형제, 자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친구는 왔다가 가지만, 가족은 영원히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친구와의 관계가 가까울지 몰라도 형제, 자매보다 더 진실 되고 가깝게 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속담을 떠올립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가족 사랑과 친밀감에 대해 본능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발전시킬 필요성을 못 느끼십니다. 어떠한 것도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 없습니다. 부모님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희생, 훈련, 겸손 그리고 존경의 과정처럼 집에서도 마음과 마음을 결합시켜야 합니다. 집안에서 밖으로 표현하며 분명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마음을 모은다는 것이 무조건 사랑하는 마음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미안하다.”“용서해줘” “사랑해” 라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듣는 것은 그들이 결코 잊지 않을 교훈입니다.

    형제는 자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Charles와 Mary Lamb 가족 이야기는 종종 언급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여동생이 갑작스럽게 정신발작을 일으키며 어머니를 숨지게 하였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아주 폭력적인 정신이상을 보여 왔습니다. 눈에 띄게 증상이 심해졌고, 챨리는 메리의 손을 잡고 보호시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감금당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한 친구는 그들이 손을 잡고 아주 슬프게 흐느끼며 정신병원이 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챨리의 마음을 도려내는 고난이었습니다. 일, 이년도 아닌 35년 동안 사랑과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는 자매의 보호자입니다.

    또한 그가 동생을 보호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 아주 부도덕하고 지독한 한 젊은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순결한 여동생의 가족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녀를 지키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진정한 오빠라면 다른 남자들의 특성을 여동생에게 충고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동생은 주의하여 오빠의 충고에 따라 친한 친구들을 사귈 때 신중히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형제들은 어린 자매들이 누구와 데이트할 것을 고려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하고 솔직하게 알려줄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가 잘 알고 남자는 남자가 잘 아니까요. 자매들은 남자 형제들에게 가치 있고 진실 된 여성인지, 유혹하기 위해 본래의 성격을 감추었는지 알아 차립니다. 진실 된 남매라면 솔직히 얘기하고,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형제 또한 자매들에게 똑같이 할 것입니다.

    자매와 형제는 순수함의 영감과 서로에게 미덕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젊은 남녀에게 가장 도전되는 일은 스스로 순결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는 것이다.”라고 듣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순결하고, 도덕적인 생활은 젊은 남녀에게 지키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꼭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양보하도록 부담감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장 13절)”

    젊은 남성을 유혹하는 테스트를 해보면 종종 여성보다 더 강하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오직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모든 자매들은 이 일에 도움이 될 기회가 있습니다! 행동과 태도를 순결하고 매혹적인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성격을 오빠와 세상에 나가서 방패삼아 그를 대접하는 기억이죠. 마귀가 그를 시험에 들게 하면, 그 순간 여동생의 생각이 떠오르게 되고 유혹하는 것을 증오하고 혐오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은 확실하게 모든 자매들에게 형제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도록 찾는 공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자매들은 형제들이 항상 악한 것을 쫓아버릴 수 있도록 매우 인상깊은 덕행을 심어줘야 합니다. 자매들에게 형제가 자기와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말 이상의 칭찬은 없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언 31장 10절)

    모든 형제들은 자매들에게 정직하고, 청결하고, 고결한 남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성격, 언어, 신앙간증들은 자매가 다른 남성을 찾는 표본으로써 선명한 안내표지가 됩니다.“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 함이니라” (누가복음 6장 45절) 또한 형제의 본보기는 자매가 남자를 고를 때 표준이 될 것입니다. 형제의 삶과 성격 때문에, 그녀의 이상은 매우 놓거나 그녀의 소망을 이길 수 있도록 가장 고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보호받을 것입니다.

    ‘보호’”라는 단어는 오늘날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소위 텔레비전, 잡지, 인터넷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 음란문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많은 다른 공적인 장소에서는 도덕적인 것에 관해서는 불행히도 낮습니다.“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장 8절) 많은 소녀들이 그들에게 있는 기회와 책임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느 민족도 여성을 보다 높게 키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성은 달리 여성보다 낫게 여김받을 것을 강요당합니다. 우리는 과도한 책임감을 여성에게 부담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집안의 자매들과 일반적인 여성들은 그들의 형제와 다른 젊은 남성들이 종종 깨닫는 것보다 훨씬 거리가 멉니다.

    형제, 자매들은 오랜 기간을 통하여 서로 사랑과 애정을 간직해야 합니다. 때로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떠내려가기 쉽습니다. 한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삶의 터전을 바꾼다던지, 가정이 성장하면서 흥미나 책임감이 나눠지는 일은 가족들을 가깝고, 따뜻하고, 하나로 묶어주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과 달리, 이메일이나 전화 또는 메신저를 통해서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의문이 생기면, 상담을 받는 것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것이 이뤄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 집안에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집안 대대로 공유하는 그들의 축복과 집안의 유산들로 인해 하나로 묶어집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끈이며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책임감과 상호간의 인내, 도움, 사랑을 가지고 삽시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 가정의 끈이 느슨하게 되어졌다거나, 냉정함, 무관심, 오해 또는 비판이 가까웠던 관계에 슬며시 들어오고 있다면 저는 관계를 재정립하기를 꼭 권고합니다. 전화 한통, 편지, 이메일은 오랜 끈을 다시 재건해 주는 첫 번째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 가족과의 추억

    가족과의 추억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기억을 만들어 갑니다. 하루 하루 더해가면서 좀더 완전한 인격을 형성합니다. 우리는 종종 많은 시간을 자녀, 손주들과 앉아서 가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지난일을 돌이켜 봅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울고, 주님이 주신 축복의 가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언젠지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던 때를 육신의 아버지의 집에서 떠났던 일로 여깁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졌던 영광과 즐거움을 그리워 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천국이 어떨 것이라는 것의 한 부분일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기억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의 삶에 길을 정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나이가 들었을 때에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기억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가장 행복한 기억은 기독교 가정 안에서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기억 또한 말입니다.

    가정에 대한 기억이라고 하면 식사시간, 기도시간, 놀이시간을 함께 한 것을 포함합니다. 함께 했던 여행과 기르던 애완동물, 서로 부벼대던 즐거움이 있습니다. 종종 거기에는 충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또한 함께 나눕니다. 가족으로써, 날마다 추억을 함께 만들고, 여러분들은 언제가 마지막 기억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삶은 매우 불분명하여 우리의 마지막 식사가 언제가 될지, 마지막 대화와 함께 걷는 시간이 언제일지 알수 없습니다. 저는 모든 전화 대화나, 이메일, 쪽지 또는 친구들과 만남에서도 “사랑해”로 항상 마지막 인사를 하는 가정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오해나 욕설 또는 분위기 좋지 않은 침묵이 있다면 아침에 집을 나서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런것들이 삶의 쓴 기억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가정을 지켜주는 말은 제가 시작할 때 말씀드린대로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사랑합니다.”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장 1절)

    착하고 친절한 젊은 남자가 출근을 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그의 몸이 집으로 보내졌을 때는 1시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곳에서 목이 졸라매여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의 여동생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이 이상하게도 더욱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녀가 유일하게 한 말한마디는 “나는 아침에 출근하는 오빠에게 못되게 굴었습니다.” 기억! 한번 만들어지면, 그것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역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거리에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과 큰 빌딩을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저는 사방에서 무리 지어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매번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과 생활, 어떤 가정에서 왔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곰곰히 생각합니다.

    당신의 자녀가 가정에 대해서 어떠한 기억을 가지겠습니까? 그들이 부모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사모하며 자녀들의 삶의 방향을 찾기에 열심을 다한 기억을 가질 것 같습니까? 안정, 감동, 용기, 축복의 기억을 가지겠습니까? 아니면 고통, 고뇌, 상처, 저주의 기억을 가지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정정당당히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낼 때 가정의 영향과 기억으로부터 회피할 수 없음을 꼭 알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이 진실되고 행복하다면, 축복은 생애를 함께 합니다.

    “죄는 파괴하는 불처럼 영혼을 엄습할 수 있습니다. 슬픔은 모든 기쁨과 희망을 꺼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달콤하고 축복된 가정의 기억은 밤하늘에 홀로 타오르는 별처럼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한가운데서도 그런 이미지가 사라지는 꿈처럼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여기에 한 남자의 간증이 있습니다. “ 저는 잠들기 전에 종종 침대 위쪽에 조용히 누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계단을 밟는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고, 문은 소리 없이 어두움 가운데서 부드럽게 열리면, 저의 침대가 보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애정이 섞인 유쾌한 대화가 있다가, 점차 진지한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머리가 나에게 다가오고, 진지한 소망의 기도문이 흐릅니다. 얼마나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바라는 것이 많겠습니까! 어머니의 눈물은 그녀의 소망의 진실을 말했습니다. 나는 가끔씩 나의 얼굴에 떨어질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커가면서, 밤 인사의 입맞춤과 함께 어머니께서는 사라지셨습니다.”

    추억은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것은 유혹과 죄에 대항하여 보호해 주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손에 자녀들을 금사슬로 묶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삶 속에 이러한 기억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 보람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무책임한 부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게으르고, 얼마나 나태한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때로는 슬픔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밀려 올 수 있습니다. 만약 신실한 기독교 가정이라면, 슬픔을 빛밖으로 내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정을 더욱 부드럽게 융화시키고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신성한 슬픔은 가정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오게 합니다. 그래서 슬픔의 기억이 가장 섬세하고, 강하게 가정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가정 예배를 통하여 모두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21세기는 매우 빠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남아 있는 것들은 기억일 것입니다. 안정과 방향 그리고 우리 삶의 목적으로서의 반석은 그리스도 가정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13절)

    모차르트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곡은 미사곡 (레퀴엠) 이었습니다. 질병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 후에 그 곡은 완성되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딸 에밀리가 마지막 곡을 완성하기 직전에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그녀에게 원고를 주면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딸아, 이것이 완성되었다. 나의 레퀴엠은 끝났다 그리고 나도 끝났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아버지” 에밀리는 부드럽게 말하기를, “오늘은 더욱 강해 보이는 걸요.” “나는 다시는 좋아지지 못할 거야.” 그녀의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에밀리, 피아노에 맞춰 성모의 찬송가와 함께 노래를 불러보아라.” 에밀리는 순종하였고, 부드러운 감정을 실어 풍부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가 끝났을 때, 그녀는 피아노에서 돌아서며 아버지의 미소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얼굴의 평안과 죽음의 안개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레퀴엠의 날갯짓으로 본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이 세상의 목숨이 다 하였을 때 축복된 가정의 기억과 같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레퀴엠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의 노래보다 더 달콤하게 마음속에서 음악을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가정에 함께 하시며 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장 큰 상급은 아마도 우리 자녀, 손주 그리고 다음 세대일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처럼 기독교 가정을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제하시며 그의 귀한 말씀이 표준과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집을 이러한 곳으로 만듭시다. “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디모데전서 6장 19절)

    우리의 목표가 이 사실을 증명하게 합시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것은 기독교 가정입니다!